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임스 먼로 (문단 편집) == 대통령으로서 == 대통령으로서 그의 국내 정책은 거의 제퍼슨과 매디슨의 연방정부의 권한이 강화되기보다는 주의 자율이 더 중요하다는 입장을 그대로 견지해 나갔다. 그는 연방정부의 권한이 점차 [[헌법]]에 명시된 제한선을 넘어간다고 보고 연방정부의 권한이 강화되는 것을 억제하는 정책을 펼쳐 나갔다. 또한 [[상비군]]에 대한 개념에도 부정적 입장이었는데 상비군 제도를 의심과 악의를 낳는 끊임없는 자극이라고 믿었으며 국민군만으로 시민들이 자신들을 방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1819년에는 미국 토지의 가격 폭락과 미국산 면화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떨어진 데다가 1812년의 [[미영전쟁]] 때 들어간 전비를 매우기 위해 과도하게 지폐를 발행한 것이 맞몰려 경제 위기를 겪기도 했는데 이는 1822년에야 겨우 진정되었다.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해서는 미국인들이 싸우기보다는 '보호자'로서의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으며 [[노예]] 제도에 있어서는 미국에 건너온 노예들을 [[아프리카]]에 재정착시키는 것만이 연방의 대립이나 전쟁 없이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생각해서 1822년 미국식민협회를 조직해서 노예들을 새로 건설된 [[라이베리아]]로 옮기기도 했다. 그래서 라이베리아의 국기는 [[성조기]]와 비슷하며 수도도 먼로의 이름을 딴 '몬로비아(Monrovia)'이다. 물론 이것은 미봉책에 불과했다는 한계가 있다. 1820년에는 [[미주리]] 주가 연방에 가입하게 되었는데 이 당시 [[미국 의회]]는 노예제 찬성주와 노예제 반대주의 세력 균형이 팽팽히 이루어져 있었지만 미주리주는 노예제 주였기 때문에 세력 균형이 깨질 염려가 있었다. 이 때문에 이른바 '미주리 협정'을 맺어 미주리 주는 노예제 주에 가입시키고, 반노예제주였던 [[매사추세츠]]주에서 따로 메인 주를 분리시켜 연방에 가입시켜 의회의 세력 균형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의 미봉책은 노예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했고 뒷날 터질 [[남북전쟁]]을 막지는 못했다. 어쨌든 경제위기가 닥치기도 했고 국내적으로는 노예 문제가 서서히 쟁점화되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먼로 행정부는 나라를 무난히 이끌었고, 노예 문제도 이 당시에는 크게 쟁점화되지는 않았다. 특히 먼로는 반대파와 타협하고 의견을 수용하는 부분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으며, 연방주의자들의 전매 특허였던 국립은행과 보호관세 주장까지 크게 받아들였다. 이런 화합주의로 북부의 분리주의는 중단되었으며, 1817년 무렵에는 연방파가 정계에서 완전히 소멸되어 그의 임기 후반기에는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반대적 정당이나 정파가 없었던 상태였다. 그래서 흔히 1817년에서 먼로의 임기 말년인 1825년까지를 미국사에서는 '화합의 시대(Era of Good Feelings)'라고 부른다. 다른 것보다 먼로가 가장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분야는 프랑스와 영국 주재 미국 대사 경력, 루이지애나 구입 성사, 프랑스 조차의 미국 유치 같은 경험이 축적된 외교 분야이다. 1818년 영국을 상대로 미국과 [[캐나다]] 국경인 [[오대호]]에서의 해군활동을 제한하는 러쉬-베것협정을 체결하여 북방에서의 군사위협을 완화시켰고, 이해에 캐나다와의 국경을 북위 49도선으로 확정해서 두 나라가 함께 오리건 지역을 점유하게 하여 양국 간의 어업분쟁까지 종식시켰다. 그리고 [[스페인]]으로부터 동부 플로리다 입수에 힘을 기울여 존 퀸시 애덤스 국무장관에게 이 일을 일임하여 성사시켰다. 이 과정에서 나온 것이 먼로 최대의 업적이자 미국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인 '''먼로 독트린'''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